2018. 5. 1. 01:20






품 안 가득 졸업을 축하하는 선물이며 꽃다발이 안겨 있었다. 지난 몇 년간 만나 교류를 해오던 사람들이 바쁜 시간을 쪼개어 찾아와 축하의 말과 선물을 건네주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당장엔 졸업에 대한 기쁨도, 기대도, 아쉬움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그래, 그저 허망했다.


코난- 사진 찍자!”


졸업이라는 특별한 날에 들뜬 아이들이 홀로 동떨어져 있던 소년의 주위로 왁자지껄하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들의 뒤를 란과 소노코가 카메라를 들고 따라오고 있었다.


아이참, 코난. 좀 웃어.”

그래요, 웃어요. 졸업이라 서운한 마음이 들 순 있겠지만, 학생 신분을 벗어나면 더 즐거울 테니까요. 너무 그렇게 서운해하지 말고 웃어요.”

그래그래. 그리고 졸업식 끝나면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구! 어때? 좀 기운 나지?”


즐거운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어쩔 수 없이 따라 웃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카메라 너머의 란이 사진을 찍겠다며 손짓하고 있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흩날리는 어느 날. 에도가와 코난의 고등학교 졸업식이었다.

 

 

 

 






 

카이른 전력 120졸업’ [코키드]

 

 

 






 

 

졸업 축하해, 명탐정.”


검은 조직은 와해되었다. 그것은 벌써 몇 년도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APTX 4869의 완전한 해독제는 만들어내지 못했고, 여러 차례 걸친 불완전한 해독제의 테스트로 내성이 생겨버리기까지 했다. 쿠도 신이치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한지도 몇 년째다. 영영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현실을 인지하고 받아들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쿠도 신이치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만큼 충실하게 에도가와 코난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했다.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황하던 코난에게,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무척 컸다.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 속에서 도움을 주고 힘이 되어 준 사람들은 많았다. 그들은 쿠도 신이치를 잊지 않을 것이고, 에도가와 코난의 곁을 함께 해 줄 것이다. 코난은 그런 사실에 감사하기로 했다.


여어, 왔냐?”


그는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마지막까지 해독제에 관한 정보를 찾아 도움을 주었다. 빚을 졌다고 생각했지만, 그 역시 코난에게 진 빚이 있기에 서로 비긴 셈 치기로 했다. 몇 년 전 종적을 감춘 세계적인 괴도를 쫓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더는 괴도가 아니었다. 무엇을 하고 사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딱히 묻지 않았다. 언제고 자연스레 스스로 밝혀오겠거니 싶었다.

붉은 장미가 가득한 커다란 꽃다발이 품에 안겨졌다. 기껏 받았던 꽃다발들을 아가사 박사님께 거의 떠넘기다시피 부탁해서 빈손이 되었었는데, 말짱 도루묵이다. 코난은 질색하는 얼굴로 키드를 바라보았다.


용케 이런 걸 가지고 다녔네.”

졸업식이잖아. 다들 가지고 다니니 눈에 띌 일이 없어.”

하하.. 그럴 리가.”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다. 커다란 장미 꽃다발을 든 멀끔하게 잘생긴 남자의 모습은 모두의 시선을 끌 만했다. 본인만 그걸 눈치채지 못할 뿐이다. 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능청떠는 것일지도 몰랐다. 저 모습이 본래의 모습인지, 변장한 모습인지 알 길 없었다. 어떻게 보면 쿠도 신이치와 제법 닮은 얼굴을 하고서는, 꽤 오래전부터 코난을 만나러 왔었다. 아마 본래의 모습이겠지, 생각하며 코난은 질색했던 자신을 보고 곤란해하며 다시 꽃다발을 가져가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쿠도 신이치였다면 아마 비슷한 연령대일 것이다. 어른이 되어있었을 자신의 모습을 잠시 그리워하며 부러움이 담긴 시선으로 키드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꽃다발은 싫어? 졸업식엔 꽃이잖아.”

배경의 벚꽃만으로도 충분해.”


바람에 떨어져 내리는 벚꽃 잎을 잠시 눈으로 쫓던 키드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까다롭긴.”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이미 잔뜩 받았다고.”

다른 사람들 건 받아줘도 내건 안 받아 주는 거야? 매정해~”

“...내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장난스럽게 우는 시늉을 해 보이는 키드의 모습에 코난은 다시 질색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남자의 손에 들린 꽃다발을 뺏어 들었다. 징그러운 자식.


키킥, 아냐. 꽃다발 말고 이거 받아줘.”


키드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동시에 퐁,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나더니 손에 들린 꽃다발이 사라졌다. 대신 고급스럽게 생긴 주먹만 한 케이스가 손에 들려 있었다. 뭔가 싶어 손안의 케이스를 만지작거리며 키드를 바라보자 씨익,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졸업 선물.”


꽃다발만으로도 족한데 뭘 이런 걸 다 주냐 싶었다. 케이스의 크기로 볼 땐 아마도 시계이겠거니 추측하며 열어보자 정말 손목시계가 들어 있었다. 너무 화려하지 않은 단정한 모양의 손목시계였다. 제법 가격이 나갈법한 선물을 보며 코난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부담스럽다거나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과 별개로 왜 이런 걸 자신에게 주는 것인가 싶었다.

녀석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이기에?


이런 걸 내가 받아도 괜찮은 거야?”

명탐정이니까 주는 거야.”

하아?”

명탐정이니까.”


그런 게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냐.

코난이 어이없어하며 하하 웃자 케이스에서 시계를 빼낸 키드가 손을 뻗었다. 손을 달라는 듯한 제스처였기에 코난은 왼손을 내밀어 주었다. 검은 조직을 쫓을 때까지는 마취총이 내장된 시계가 채워져 있었지만, 꽤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빈 손목이었다. 더는 모리 탐정을 대신해 추리할 일이 없어졌기에, 힘없는 작은 아이에서 훌쩍 더 자랐기에 마취총 시계가 필요 없어 더는 차고 다니지 않았다.

키드는 비어있는 코난의 손목에 반짝거리는 손목시계를 채워주었다. 시계가 닿은 곳이 차가웠지만, 금세 제 체온에 데워졌다. 손목에 맞춰 끈을 조절해 채운 키드가 시간까지 확인하고는 손을 떼어냈다. 시계의 묵직함이 어색해 괜스레 손목을 만지작거리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으며 슬쩍 키드를 바라보았다.


졸업 선물.. 고마워.”

받아줘서 나야말로 고마워. , .”


쑥스럽게 전한 감사의 인사에 따라 답하며 웃던 키드가 잊고 있던 것이라도 떠올린 마냥 손뼉을 치더니 코난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져 있는지도 몰랐던 안경을 잡아 벗겨냈다.


신이치, 졸업 축하해.”

“.....”

드디어 고교생 탐정에서 벗어났네. 앞으로도 탐정으로서의 활약 기대하고 있어요.”

“..........”


멈춰있던 쿠도 신이치의 시간이 순식간에 훌쩍 흐른 기분이었다. 코난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키드를 바라보다가 하, 짧게 숨을 내쉬며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시계를 선물 받으며 느꼈었던 묘한 기분의 정체를 그제야 알아차렸다. 키드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녀석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느냐가 중요했던 것이다. 눈앞의 남자는 이제 코난에게 그저 괴도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십 년이 넘는 시간을 알게 모르게 함께하며 둘의 관계는 탐정과 괴도 이상의 사이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에도가와 코난이 성인이 되기까지는 아직 조금의 시간이 더 남아있지만, 당장엔 학생 신분을 벗어났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닐까?

코난은 어리둥절해 하며 얼굴을 덮은 제 손을 쿡쿡 찌르는 키드의 멱살을 잡았다. “어어?” 당황해하는 그의 멱살을 끌어와 얼굴을 바짝 맞붙였다. 아슬아슬하게 입술이 닿기 직전, 키드가 얼른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이건.. 진도가 빠른 게 아닐까, 명탐정?”

바보냐. 이건 빠른 게 아니라 속 터질 만큼 느린 거지.”

내가 말한 건 다른 의미로 빠르단 거였지만.. 이제 졸업했다고 막 나가려는 거야?”

아직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키스로 막 나간다는 말 듣기에는 억울한걸. 진짜 막 나가는 게 어떤 건지 보여줘?”

“..아니요, 참아주세요.”


고개를 내저으며 뒷걸음질 치는 키드를 보며 코난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손 떼.”


잡고 있던 멱살을 놓으며 말하고 이리 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이자 이번에는 키드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코난이 곧 쯧, 혀를 차자 얼른 한걸음 다가왔다.

하여간 한 번 말로 해선 안 듣는 녀석.

엉거주춤 다가오는 키드의 목덜미를 손으로 감싸며 바짝 입술을 맞붙였다.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정말 오래도록 기다려왔던 졸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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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IMØ(리모)
2018. 4. 16. 15:56

* 이전 카이른 전력들과 이어집니다.

1. '처음'

2. '방학'

3. '인형'

4. '누군가를 사랑함에 있어서'








 

 

 

필요한 것들을 모두 챙겨 넣었는지 가방 안을 확인했다. 이걸로 두세 시간쯤은 금방일 테지. 카이토는 되도록 눈에 띄지 않고 평범한 차림새의 자신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캡모자를 머리에 눌러썼다. 되도록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지만, 자신이 만나러 가지 않으면 앞으로 영 남자를 만나지 못할 것 같았다. 그사이 두어 차례 더 일을 맡아 했지만, 모두 전화나 문자로만 내용이 전달된 채 얼굴 한 번을 마주하지 못했다. 명백하게 카이토를 피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내가 왜-

절로 투덜거림이 새어 나왔다. 자신을 밀어내려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스스로 마음 정리를 위해서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정말 바쁜 것이거나. 남자는 공안의 일 외에도 조직의 일도, 평범한 포와로의 아르바이트도 모두 소화해 내고 있으니까. 하지만 정말 바빠서 자신에게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닐 거라고 카이토는 생각했다. 그는 하고자 한다면 시간을 쪼개어서라도 자신을 찾아 왔을 테다.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집을 나섰다. 다정과 배려, 상냥함이 없는 사랑이란 게 정말 사랑인지를 곱씹으며 역으로 가 지하철을 탔다. 호감을 얻겠다며 자신을 대하던 때가 차라리 사랑에 빠진 모습에 가까웠다. 집착과 질투, 무관심. 이런 건 사랑이 아니지 않나? 카이토는 남자의 행동에 정의를 내려 보려 했다. 애증? 아냐, 거기까진 아니야. 머리를 털며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 이리저리 생각해 봐도 결론은, 남자의 사랑 방식이 굉장히 삐뚤다는 것밖엔 나오지 않았다. 카이토가 하기 나름이라지만,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하란 건지 알 수 없다. 남자의 말에 나름 고분고분 따르고 있는데, 뭐가 그렇게 맘에 들지 않았던 걸까.

지하철로 이동하고 역에 내려 걸어가면서도 카이토는 내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분명 오늘의 방문은 남자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전화 너머로 일만 죽어라 시키는 얄미운 면상을 한 번 봐주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는 것을.

무엇보다도 자신이 보고 싶었다. 스스로 생각하고도 어이가 없어진 카이토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며 앓는 소리를 냈다.



미쳤지,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보고 싶다고 생각할 순 없었다. 게다가 정말 보러 오기까지 하다니. 뒤늦게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이미 카이토의 눈앞에는 카페 포와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카이른 전력 120진심’ [아무카이]

 

 

 







 

카페 포와로의 알바생인 아무로 토오루는 사뭇 다른 인상이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잘 웃었다. 그 모습은 초반 자신에게 보이던 그 모습이었던 것을 카이토는 뒤늦게 깨달았다. 저런 꾸민 듯한 상냥함이 좋을까, 스스럼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이 좋을까. 어느 하나를 고를 수가 없었다. 적절히 섞어주면 좋을 텐데.

곁눈질로 아무로를 흘끔거리다 어느새 미지근해진 주스를 홀짝이며 펜을 쥔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포와로에 들어 온 지 벌써 두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사이 밖은 해가 기울고 있었고, 카이토가 가져온 방학 숙제도 거의 마무리 되어갔다. 포와로의 마감 시간까지는 아직 좀 더 남아 있을 테지만, 오늘 마감은 아무로가 하지 않는 날이기에 곧 퇴근할 거란 것도 카이토는 알고 있었다.

그전에 얼른 숙제를 끝내고 나가서 기다려야지. 다 쓴 노트의 페이지를 넘기고 얼마 남지 않은 것까지 끝낸 후 고개를 드니 퇴근하려는 듯 아무로가 앞치마를 벗고 있었다. 숙제를 끝내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렸나 보다. 얼른 테이블 위에 널린 노트와 책을 가방에 마구잡이로 쑤셔 넣으며 아무로의 동태를 살폈다. 정말 얄밉게도 아무로는 오늘 마감을 할 알바생에게 서그럽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는 카이토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카페를 나섰다. 아마 카이토가 혼자 있었다면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다 씩씩대며 뒤쫓아 나갔을 테지만, 지금은 처음 와보는 카페 안이다. 그와 아는 사이임이 티 나지 않게 서두르지 않으며 가방을 마저 싸서 어깨에 걸치고 지갑에서 지폐를 꺼냈다. 그리고 애써 여유롭게 계산을 끝내고 카페를 나섰다.

밖은 이미 어두워졌지만, 거리는 가로등으로 여전히 환했다. 카이토는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재빠르게 눈으로 훑어 아무로를 찾았다. 하지만 정말 자신을 두고 혼자 가버린 것인지 어디에도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진짜 그냥 간 거야?!

생각지 못한 일에 당황스러워진 카이토는 얼빠진 얼굴로 다시 거리를 훑었다. 어이없고 허탈해진 기분에 헛웃음 지으며 푹 눌러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잔뜩 눌린 머리카락을 쓸어냈다. 갑갑함과 잠시 솟구쳤던 분노가 밤바람의 차가움에 흩어져 식어갔다. 뭐 하러 여기까지 왔나 싶어졌다. 스스로가 한심스러워져 길게 한숨 쉬며 다시 모자를 푹 눌러썼다.

얼굴이라도 봤으니 됐지.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게 걸렸지만, 이쯤 되니 얼굴 마주하고 나눌 대화가 뭐가 있겠나 싶어지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역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래도 목표했던 방학 숙제는 다 끝냈으니 시간을 헛되게 보낸 것도 아니다. 카이토는 이걸로 만족하기로 하며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집에 가자마자 씻고 늘어져 잠이나 자야지. 이제 곧 개학인 걸 생각하니 벌써 숨이 텁 막히는 기분이었다.

, 진짜.. 기껏 시간 내서 얼굴 보러 왔더니.

신호에 걸린 건널목 앞에서 선 카이토가 애꿎게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쳤다. 어차피 일은 방학 동안만 해주기로 했던 터라 정말 개학 하고 나면 아무로를 더 볼 일이 없어진다. 그리고 아마 남자는 더는 자신을 보러 오지 않을 것이다. 카이토는 그 점이 아쉬웠다.

치사하고, 나쁜 사람.

신호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밤공기가 생각보다 서늘해서 옷깃을 여미며 신호등을 바라보고 있자니 영원히 바뀔 것 같지 않던 신호가 드디어 바뀌었다. 한참 멈춰있던 걸음을 막 떼어냄과 동시에 차 한 대가 매끄럽게 카이토의 앞을 막아섰다.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던 카이토가 뭔가 싶어 바라보자 꽤 익숙한 차다. 보조석의 문이 열리고 역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



뭐 이딴 식으로 사람을 태우냐.

실컷 찾을 땐 보이지 않던 아무로가 차 안에서 재촉하듯 고개를 까딱이는 것이 보였다. 못마땅한 얼굴을 한 카이토는 정말 마지못하단 듯 차에 올라탔다.



불만 있어 보이는데?”



카이토의 입이 삐죽 튀어나와 있다는 걸 알아차린 아무로가 차를 출발시키며 말해 보라는 듯 눈짓했다.



뒤도 안 돌아보고 두고 간 줄 알았거든.”

그럴 생각이었지.”

하아? 근데 왜 와서 타래?”

물어보고 싶어서.”

?”



신호에 걸려 잠시 차를 멈춰 세운 아무로가 카이토를 곁눈질했다.



여기까지 왜 온 거야?”

“..........”



예상하지 못한 물음에 카이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순순히 보고 싶어 왔다고 말하기에는 뭐랄까, 자존심이 상했다. 아무로를 상대로 내세울 것 없는 자존심이었지만, 카이토로서는 그랬다.



곧 방학 끝나지?”



카이토가 대답할 생각이 없단 걸 알아차린 아무로가 화제를 돌리며 바뀐 신호를 보고는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느리게 흘러가는 창밖을 보며 카이토가 응, 짧게 대꾸했다.



방학 숙제는 끝냈어? 할 시간 없었을 거 같은데.”

누가 엄청 부려 먹어서 시간이 없긴 했지.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거의 끝냈어.”

그거 다행이네.”

지금 어디 가?”



아무로의 물음에 퉁명스레 대답하던 카이토는 창밖의 풍경에 문제가 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익숙한 곳이지만, 자신의 집과는 다른 방향의 길이다. 당황한 눈으로 아무로를 바라보았지만, 남자는 대답 없이 운전에 집중할 뿐이었다. 이제는 큰길을 벗어나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서 돌고, 또 돌고 있었다.



이거 납치야?”



피식 웃으며 아무로는 부드럽게 핸들을 꺾어 어느 건물의 주차장에 차를 밀어 넣었다.



집으로 데려다준다곤 안 했었어.”



확실히 그랬지만, 아니, 타라고 한 거면 데려다준단 것 아닌가? 카이토는 가방을 끌어안은 채 불신의 시선을 아무로에게 보냈다.



여기 어딘데?”

아까 질문에 대답하면 데려다줄게.”

“..아저씨 집이야?”

어려운 질문 아니잖아.”



질문하는 아무로의 입장에선 쉬울지 모르지만, 대답해야 하는 카이토의 입장에서는 어려웠다. 카이토는 차의 잠금을 풀어내며 문을 열었다.



기왕 온 거 구경이나 할까나.”

어딜.”



냉큼 내리려 차 밖으로 다리를 뻗는 카이토의 뒷덜미가 금세 아무로의 손에 잡혔다. , 카이토가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목을 조이는 셔츠를 잡고는 버둥거렸다.



구경시켜줄 거 아니면 집에 데려다줘. 여기는 길 몰라.”

그러니 대답하라니까.”

그게 왜 궁금한데. 그냥 와보고 싶어서 와 봤어.”

그냥 와보고 싶어서? 그 말 하는 게 그렇게 어려웠어?”



제 말을 따라 하며 비꼬듯 말하는 아무로를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며 카이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였다.



“..시간 남아돈다고 비아냥거릴 거 같아서 말 안 했던 거야.”

진짜야?”

~ 그럼 진짜지. 아저씨, 사람 너무 못 믿는 거 아냐?”

믿을 상대를 믿지. 따라와.”



거짓말이란 게 들킨 걸까? 차에서 내려 성큼 앞서 걸어가는 아무로를 당황해 바라보며 카이토가 가방을 끌어안은 채로 엉거주춤 따라 차에서 내렸다.



이유 말하면 데려다준다면서! 지금 시간도 늦었는데 뭘 따라오래.”



앞장서 가던 아무로가 잠시 무표정한 얼굴로 카이토를 바라보다 이내 빙긋이 웃었다.



데려다줄 테니 들어왔다가 가요, 쿠로바 군.”

“..........”



분명 그냥 와 봤다는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게 뻔했다. 무섭게 또 존댓말이나 쓰고 말이야. 무표정하게 자신을 보던 아무로를 떠올리며 카이토는 이대로 혼자 돌아갈까 고민했다. 왠지 따라 들어가면 안 될 거 같았지만, 망설이던 걸음은 어느새 느리게 남자를 따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한 걸음걸음 옮길 때마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싶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앞서갔던 아무로가 현관문을 연 채 카이토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카이토는 느리게 걷던 걸음을 멈췄다가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 진짜 내가 미쳤지. 몇 시간 전에 했던 말을 떠올리며 그대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뒷걸음질 치던 카이토를 눈치챘던 아무로가 어느새 성큼 다가와서는 팔을 쥐고는 집 안으로 그를 끌었다. 발에 힘을 주고 버텨보았지만, 말짱 헛수고였다. 지이이익-, 발이 끌리는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결국 현관문을 넘고야 말았다.



“...이거 납치..”

구경하다 간다면서요.”

아까 어딜, 이라며 잡았으면서.”

대답을 회피하려 하니 잡았던 거뿐이에요.”



안으로 들어가라는 듯 카이토의 등을 툭 떠밀며 아무로가 현관문을 잠갔다. 잠금장치가 몇 개가 달려있는지, 카이토는 이중삼중으로 잠긴 잠금장치들을 질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감금...”



문을 다 잠그고 가지런히 신을 벗어 안으로 향하던 아무로가 카이토에게로 서늘한 시선을 보냈다.



진짜 감금이 어떤 건지 알려줄까요?”

“..아니요...”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말고 들어와요.”



아무로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안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순간 카이토 역시 짜증이 울컥 치밀어 얼굴을 찡그렸다. 남자의 태도도 그러했지만, 자신이 그에게 짜증 거리인가 싶은 생각도 동시에 들었던 탓이다. 저런 모습이 보고 싶어 온 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냥 갈래.”



끌고 온다고 끌려 온 자신이 멍청했다. 카이토는 문의 잠금장치로 손을 뻗었다. 지하철이 끊길 시간이 되어갈 텐데, 택시를 타고 돌아가야 할 것 같다. 빠른 손놀림으로 잠금장치 두 개를 풀어낼 때쯤 다시 짜증 섞인 한숨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가까워지는 조용한 발소리. 마지막 잠금장치를 풀기 전 아무로가 카이토의 어깨를 잡아 몸을 돌리더니 거칠게 문으로 떠밀었다. 문에 등을 부딪친 카이토가 반사적으로 제 어깨를 쥔 아무로의 팔을 잡았다. 안고 있던 가방이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아프잖아..!”

왜 이렇게 기분이 저기압이야?”

아저씨가 계속 짜증 내니까 그렇지.”

네가 말을 안 들어서라고는 생각 안 해?”

내가 뭘 그렇게 말을 안 들었다고.”

그걸 내가 일일이 알려 줘야 해?”



카이토가 불만스럽게 입을 삐죽였다. 물론 제대로 진심을 말하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뭘 그리 말을 안 들었나 싶은 것이다. 자기는 순 짜증만 부리는 데다가 강압적이기 까지 하면서 말이다.



들어갈 테니까 놔요.”



여전히 어깨를 잡아 누르는 손길이 아팠다. 얼굴을 찡그리며 잡힌 어깨를 비틀며 말하자 그제야 어깨를 놓아준다. 아픈 어깨를 문지르며 카이토가 바닥을 굴러다니는 가방을 집어 들고 아무로를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갔다. 깔끔하게 잘 정리된 공간을 눈으로 훑으며 거실의 소파로 가 앉으니 곧 눈앞으로 주스가 담긴 컵이 내밀어졌다. 컵을 받아들어 입가에 가져다 대며 눈으로 아무로를 쫓았다.



여기 왜 데려온 거예요?”



진짜 납치 감금 하려는 것도 아니면서. 뒷말을 삼키며 옆에 앉은 아무로에게 고개를 돌리자 픽, 웃으며 바라본다.



너랑 같은 이유.”

보고 싶어..”



무심코 이어 말하다 카이토는 뒤늦게 아차 싶어져 입을 다물었다. 아무로의 시선이 가늘어지다 이내 웃음기가 섞였다.



내가 보고 싶었어?”

“..........”

난 그냥 데려온 거였는데.”

, 진짜.. 아우.. 아저씨 완전 치사해.”



민망함에 손의 컵을 테이블에 올려둔 카이토가 가방을 꽉 끌어안고 화끈거리는 얼굴을 묻었다. 그냥 와봤다고 대답했던 것을 왜 깜빡했지. 빌어먹을, 진짜, 망할, 변태 아저씨. 멍청한 쿠로바 카이토. 옆에서 쿡쿡,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얼른 도망가고 싶어졌다.



“..집에나 보내줘요.”

내일.”

내일은 무슨 내일이야!”



얼토당토않은 말이라도 들은 양 버럭거리며 고개를 들자 어느새 다가온 것인지 바로 코앞에 아무로의 얼굴이 있었다. 깜짝 놀라 뒤로 엉거주춤 물러나자 그만큼 몸을 붙여오며 다가왔다.



일이 생겼다고 내일 아르바이트를 빼뒀거든.”

그게 나랑 무슨..”

너 때문에 뺀 거니까.”

왜 혼자 맘대로..”

네가 그냥 내가 일하는 곳까지 올 리가 없잖아?”

“..........”

나 보러 온 것 같아서 말이야.”



무서운 사람이다. 자신을 꿰고 있는 눈앞의 남자는 무슨 말을 속지 않을 게 뻔했다.



“..그래서 아저씨네 집에 데려왔단 거야? 완전 음흉하잖아. 무슨 짓을 하려고~”



장난스럽게 말하며 웃었지만, 분명 어색한 티가 날 것이다. 카이토는 아무로를 피해 고개를 돌린 채로 막힌 등 뒤 대신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오고 있었다.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잖아? 알면서도 따라온 건 너고.”

돌아가겠다니까 억지로 안까지 끌고 온건 아저씨면서..!”

충분히 도망갈 수 있으면서.”



도망가게 둘 거냐고. 불만을 내뱉지 못한 채 입을 삐죽이고 있으니 아무로가 카이토의 턱을 잡아 자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야?”

“..아까부터 뭘 계속 왜냐고 물어..”

네 입으로 제대로 말해 보라고.”

..”

네 진심.”



진심? 카이토가 눈을 끔벅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아무로를 바라보았다.



내가 왜 보고 싶었어?”

“..그야..”

여기까진 왜 따라 왔고?”

그거야...”

어때? 날 좋아해?”

“..........”

자각이 없는 거야? 아니면 자각하면서도 아닌 척? 그럼 꽤 선순데.”



쉴 틈 없이 질문을 쏟아내던 아무로가 마지막 말을 하며 슬쩍 웃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대꾸하려던 카이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로가 한 질문들을 하나하나 생각해보면 역시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다시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니, 귀도 목도 온통 화끈 열이 올랐다.

진짜 위험해, 위험해.

이미 늦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했다. 아니, 일단 눈앞의 남자를 피해야... 이도 저도 안 되겠지. 한숨 쉬며 품 안의 가방을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그래서 꼬맹이, 대답은?”



행여나 도망갈세라 양팔 안에 카이토를 가둔 아무로가 대답을 재촉했다. 하지만 카이토는 그저 가방을 더 꽉 끌어안기만 했다. 쓸데없는 자존심 싸움이란 건 알지만, 고분고분하게 대답하고 싶은 맘은 들지 않았다.



내가 전에 말했었지. 내가 어떨지는 너 하기 나름이라고.”



아무로에게 불신의 시선을 던지며 카이토가 입을 달싹였다.



진짜 납치 감금 강간 순으로 범죄라도 저지르게?”

글쎄?”



정말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면서.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어떤 일을 해도 크게 긴장하거나 하지 않았는데, 손끝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카이토는 가방을 끌어안은 채 손을 꼼질 거리며 다시 심호흡했지만, 역시 쉽지 않다 생각했다. 항상 숨기는 것에나 능하지 진심을 표현한다는 것은 카이토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좋아합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아무로가 카이토에게로 고개를 기울였다.



미안하지만, 잘 안 들렸어요. 뭐라고 그랬어요, 쿠로바 군?”

“..........”



들었으면서 못 들은 척하기는. 처음 한 번이 어려운 법이다. 이번엔 못 들었다고 능청 떨지 못하게 카이토는 고개를 들어 아무로의 귓가로 입술을 가져다 대고 달싹였다.

얼핏 보이는 아무로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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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IMØ(리모)
2018. 3. 16.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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