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30. 00:39







"Trick or Treat."



카이토는 눈을 꿈뻑이며 하얀 천을 뒤집어 쓴 채 앞을 막아선 이를 바라보았다. 천에 가려졌지만, 훤칠하게 큰 키며 덩치는 딱히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누군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뭐하냐?"



이런 장난을 할 녀석이 아닌데, 뭔가 꿍꿍이라도 있는 것인가 싶어 가만 생각하며 뒤집어 쓰고 있는 천을 잡아 당겼다. 하지만 벗겨질새라 얼른 카이토의 손을 밀어내며 조금 흘러내린 천을 다시 원상복귀 시킨다. 허어, 카이토는 헛웃음이 흘러나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Trick or Treat."


"뭐야, 그 말 밖에 할 줄 모르냐?"



장난다운 장난을 칠 수는 있겠나, 생각하며 카이토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삼삼오오 짝을 지은 아이들 무리가 이미 몇 차례 휩쓸고 지나간 터였다. 남은 것이라고는 비닐 포장이 된 싸구려 레몬 사탕 하나 뿐이었다. 이것이라도 받겠느냐는 시선으로 손에 들고 흔들자 눈앞의 유령이-아마도 유령일 것이다. 하얀 천을 뒤집어 쓴 것으로 할로윈 분장을 끝낸 것이냐고 비웃어 주고 싶을만큼 허접한 유령이다.- 고개를 내저었다.



"그걸로는 부족해."


"하, 과자가 얻고 싶었다면 일찍 오지 그랬어."


"Trick or-"


"아아, 이게 부족하다 싶으면 장난 치던가."



네가 장난을 쳐봤자, 뭘 얼마나 치겠냐. 카이토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카이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집어 쓰고 있는 하얀 천의 한쪽을 들어올려 카이토에로 뒤집어 씌웠다. 펄럭이며 떨어져내리는 하얀 천에 갇힌 꼴이 된 카이토가 다시금 눈을 꿈뻑이며 함께 천을 뒤집어 쓴 모양새가 된 사구루를 올려다 보았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투덜거리려다가 시야 가득 들어온 사구루의 얼굴에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풋, 웃음을 터트렸다.



"꼴이 그게 뭐야."


"과자를 미처 준비하지 못했어."



안 봐도 비디오다. 카이토를 거쳐간 아이들 무리가 사구루도 거쳐간 것이겠지. 그 중에는 사구루의 열혈팬인 여학생 무리도 있었으니,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터다. 카이토는 새빨간 립스틱이 발린 사구루의 입술을 바라보다가 이어서 뺨에 찍힌 붉은색의 입술 모양을 손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감히 어떤 녀석들이 이래 논거야?"



아무리 막나간다고 해도 다짜고짜 뺨에 뽀뽀해? 그보다 이 자식은 왜 피하지 않고 이런 자국을 남겨 놓은거야.

불만스러운 손길로 뺨에 찍힌 입술 모양의 립스틱을 문질러 닦았지만, 쉽사리 닦이지 않았다. 오히려 붉게 번져서는 카이토의 손이며 사구루의 뺨을 더럽히고 있었다.



"나카모리 씨와 코이즈미 씨가."


"아아."



납득해 버렸다. 다른 여학생이었다면 사구루의 얼굴에 손도 못 대었을 테니까. 제 손에 묻은 붉은색을 닦아내려 문지르다가 이내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세수해도 안 씻길거 같은데. 그래가지고 집까지 갈 수 있겠어?"



하쿠바 사구루가 말이야. 뒷말은 삼켜내며 장난스럽게 말을 건네자 사구루는 걱정없다는 듯이 웃었다.



"이대로 유령이 되어 갈 테니 괜찮아. 어차피 할로윈이잖아."


"켁, 이걸 뒤집어 쓰고 가겠다고?"


"그다지 눈에 띄지 않을걸."


"그건 그렇다만..."


"나보다는 네 걱정을 하는게 어떨까?"


"나? 난 왜?"



사구루가 정말 모르겠냐는 얼굴로 영문 몰라하는 카이토를 바라보았다.



"왜? 뭐 문제 있어?"


"곧 문제가 생길거야."



좀 알아듣게 말할 것이지. 카이토가 찡그린 시선으로 올려다보자 사구루가 턱을 가볍게 쥐어왔다. 뭔가 싶어서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턱을 쥐지 않은 다른쪽 손을 움직여 카이토의 입술을 가볍게 터치했다. 아니, 손에 쥔 뭔가로 입술을 문질렀다.

뭔가 싶어 눈을 꿈뻑이며 바라보고 있자니 진지한 얼굴의 사구루가 카이토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달콤한 향이 나는 것이 입술에 발리고 있었다. 당장의 상황을 뒤늦게 인식한 카이토는 그것이 립스틱임을 한박자 느리게 알아차렸다.



"뭐, 뭐 하는거야!"



얼른 사구루의 손을 밀어냈지만, 이미 늦었다.



"당한만큼 누군가에게 갚아주라며 주고 갔거든."



새빨간 립스틱을 가볍게 흔들어 보이며 사구루가 웃었다. 이 자식이...



"야! 그렇다고 그걸 나한테 하면 어떡해!"


"장난 치라며."




장난을 쳐봤자 얼마나 치겠냐고 생각했던 몇 분 전 자신의 뒤통수를 한 대 치고싶은 심정이었다.



"쪼잔하게 사탕 하나로 만족 못해서 이런 장난을 치냐."


"딱히 사탕 하나로 부족해서가 아니야. 네게 장난을 치고 싶었던 것 뿐이지."


"-아, 그러셔."


"잘 어울리네. 예뻐."



붉게 칠해진 입술을 톡 건드리며 사구루가 웃었다. 자신의 몰골이 어떨지 상상이 되지 않는 카이토가 잔뜩 인상을 쓰며 입술을 문지르려 손을 들어올렸다가 멈칫했다. 잘못 문질렀다가는 지워지기는 커녕 번지기만 할 것이다.



"진짜, 이 꼴로 어떻게 돌아다니라고."


"지금 정도면 볼만한거지."


"하? 이게?"



불만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자 사구루가 답지않게 장난스레 웃었다.



"진짜 못 볼 꼴로 만들어 줘?"


"-뭐?"



사구루의 양손이 뺨을 감싸왔다. 순간 드는 불길함에 카이토가 주춤 뒷걸음질 쳤지만, 미처 피할 틈없이 빠르게 다가온 입술이 포개어졌다. 달콤한 향이 입가에 맴돌았다. 순간적으로 언제나처럼 입술을 열던 카이토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사구루의 어깨를 잡아 밀어냈다. 하지만 뺨을 감싸쥔 손에 힘이 들어가며 놓질 않아서, 입술을 떼어내는 일에는 실패하고야 말았다.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입술 사이로 달뜬 숨이 오고갔다. 벌어진 입술이 맞닿은 채 비비다가 쪼옥, 질척한 소리를 내며 빨아들이고 그 사이를 침범한 혀가 서로의 입안을 거침없이 훑어냈다. 천 안의 갇힌 공기로 호흡하기 힘들어진 것을 느낄 때까지 입술을 맞대어 비비던 둘은 가쁘게 숨을 내쉬며 겨우 떨어졌다.



"...야...이... 망할 자식아...!"



가쁜 호흡에 머리가 멍해져있던 카이토가 사구루의 얼굴을 보자마자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달아서는 사구루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생각지 못한 공격에 사구루가 걷어차인 곳을 손으로 감싸며 몸을 움츠렸다.



"아, 진짜! 생각이란 걸 좀 하고...!"



몸을 움츠린 채인 사구루의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소리를 참으며 웃는 것이란 것을 알아차린 카이토가 들썩이는 어깨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지금 웃음이 나오냐? 나와?"


"아, 미안해."


"미아안? 미안해? 이거 어쩔거야. 이러고 어떻게 돌아 다니라고!"



엉망진창 립스틱으로 붉게 번진 입가를 가리키며 카이토가 버럭 소리질렀다. 몸을 움츠리고 있던 사구루가 고개를 들어 그런 카이토를 바라보더니 이번엔 참지 못한 듯 소리내어 웃었다.

이... 얄미운 자식.



"아, 오늘은 일찍 들어가기로 해서 말이야. 먼저 가볼게."


"..뭐?"



사구루는 망설임없이 카이토의 어깨를 가볍게 밀어 천 밖으로 쫓아냈다. 그리고 반쯤 흘러내린 천을 잘 갈무리하고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럼 내일 봐."


"...야.. 야, 잠깐만!"



서둘러 팔로 얼굴을 가린 카이토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성큼성큼 등을 돌려 걸어가는 사구루의 뒤를 쫓았다. 저 천이라도 뺏아야겠다는 생각에 얼른 따라가 천을 잡아 당겼지만, 이 정도의 일은 예상한 듯 사구루 역시 천을 쥔 채 놓지않고 있었다. 게다가 답지않게 걸음도 빨라서 카이토는 거의 뛰다시피 뒤를 따라가며 임시방편 삼아 천으로 입가를 가렸다.



"야, 이, 치사한 자식아."


"하하."


"웃기냐? 웃겨? 웃지마! 그리고 좀 천천히 가. 야!"


"부탁치고는 너무 거친데."


"아, 진짜. 알았으니까, 나도 좀 같이 가."



하얀 천을 뒤집어 쓴 사구루의 뒤에 찰싹 달라붙어 이동하며 카이토가 내도록 투덜거렸다. 그러다가 점점 늘어나는 사람들에 눈치를 살피며 냉큼 천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이게 더 모양새가 이상하다며 사구루가 카이토를 밀어냈지만, 허리에 팔을 감아 찰거머리마냥 달라붙어서는 떨어지지 않았다. 



"너 진짜... 두고 봐."



어쩔 수 없다는 듯 더는 밀어내지 않는 사구루에게 철썩 붙은채로 엉거주춤 이동하며 카이토가 이를 갈았다. 그래그래, 건성으로 대꾸하며 사구루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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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IMØ(리모)
2018. 10. 7. 19:07

 








어두운 먹구름에 가려져 빛을 잃은 둥그런 달.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어둠이 드리운 옥상. 공기를 찢어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가르는 탄환이 향하는 곳은 한데 엉키듯이 서로를 끌어안은 두 사람. 빗물이 고인 바닥 위로 떨어져 내리는 붉은 피. 어둠 탓에 그저 검게 물들어가는 물웅덩이가 수정 구슬을 가득 채워냈다.

바닥으로 무너지는 두 사람 중 총에 맞은 것은 누구지?

그저 크게 다친 것일까, 죽은 것일까?

명확한 답을 내어주지 않는 수정 구슬을 매서운 손길로 쳐내며 아카코가 거칠어진 숨을 내쉬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혀 바닥을 구르는 수정 구슬은 결국 반으로 쪼개어졌다.

 


아가씨.”

시끄러워. 정리나 해.”

 


아카코의 등 뒤를 지키던 등이 굽은 사내는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를 옮겨 깨어진 수정 구슬의 잔해를 주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거친 손길로 벗어내며 마녀는 자신의 방으로 신경질적인 걸음을 옮겼다.

총에 맞는 것은 누구지?

하얀 괴도? 아니면 괴도를 쫓는 탐정?

어차피 자신이 훔쳐본 미래가 그대로 실현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미래는 바뀌기 마련이었기에, 대책만 마련한다면 누구도 다치지 않고 끝날지도 몰랐다. 하지만 고집이 센 두 남자는 마녀의 말을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둘 중 누가 총알을 받을지 안다면-

안다면?

아카코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어내던 손을 멈췄다. 자신의 매력이 통하지 않는 괴도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기에 그 남자는 죽어선 안 되었다.

그럼 탐정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빛과 같은 남자를 떠올렸다. 자신을 보며 얼굴을 붉히는 동급생은 이미 자신의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괴도를 잡으러 가지 말라고 말한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카코는 어렴풋하게 그 답을 알고 있었다. 괴도의 일에 한해서는 탐정으로서 고집을 꺾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마녀는 온전히 탐정을 가졌다고 할 수 없었다.

고집쟁이들.

멈추었던 손을 움직여 단추를 모두 풀어낸 아카코는 블라우스는 벗어내고 편한 평상복을 몸에 걸쳤다. 누가 총에 맞을지 알든 모르든 상관없었다. 아카코는 둘 다 살릴 생각이었다. 그러하기에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괴도와 탐정이 함께 위험에 노출되는 미래를 막을 방법을 말이다. 욕심이 많은 마녀는 괴도도, 탐정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괴도도 탐정도 탐이 나는 이들이었다.

이미 괴도의 예고장은 공개되었다. 괴도가 예고를 취소할 리가 없으니, 탐정을 막아야겠지.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상냥한 남자는 어쩌면 마녀의 부탁을 들어줄지도 몰랐다. 들어주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 하겠지만 말이다.

 





 

[하쿠바 사구루 x 코이즈미 아카코]

 





 

! 뭐라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네. 그런 걸 왜 나한테 말해?”

 


예상한 대로의 반응이었다. 아카코는 가늘게 뜬 눈으로 카이토를 바라보았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기분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쩜 이렇게 제 뜻대로 되지 않는 남자인지. 하지만 이럴수록 오기가 생긴다는 것을 그는 알아야 했다. 정말 죽어버리면 속이라도 편할 텐데, 그걸 또 두고 보지 못할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아카코는 재차 카이토를 불만스럽게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고개를 숙여 귀엣말을 건넸다.

 


예고를 취소하진 않더라도 몸조심은 해, 괴도 씨.”

 


이 정도로 이야기했으면 아예 흘려듣진 않을 것이다. 몸을 펴고 제자리로 돌아가려 발길을 돌리던 아카코는 자신과는 다른 붉은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아마 카이토를 관찰하다가 우연히 시선이 마주친 것일 테다. 사구루와 시선을 맞춘 채로 빙긋이 웃어주자 역시나 붉어지는 뺨이 만족스럽다. 아카코는 그런 사구루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탐정을 막을 여러 방법을 떠올렸지만, 그 역시도 방해를 해 봤자 의욕만 더욱 불타오를 것이 뻔했다. 사구루의 앞에서 멈춰 선 아카코는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시선을 맞췄다.

 


하쿠바 군.”

코이즈미 씨.”

 


서로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평소 카이토를 사이에 끼고 대화를 나눈 것이 대부분이었던 터라, 실상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적은 거의 없었다. 아카코의 경우 다가온 남자들이 주로 떠드는 일이 다반사였기에 어떤 식으로 대화를 나눠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랬기에 아카코는 돌려 말하지 않기로 했다.

 


내일 나와 데이트 하지 않겠어? 시간은 오후 8시에 XX 공원에서 봤으면 하는데.”

 


교실에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마주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로 동시에 꽂혔다. 예상하지 못한 말에 사구루 역시 놀란 듯 잠시 동그란 눈으로 아카코를 바라보다가 이내 빙긋이 웃었다.

 


내일은 키드의 예고일이라 곤란합니다.”

어머, 그랬어? 그건 몰랐는걸. 그래도 난 꼭 하쿠바 군과 내일 데이트를 하고 싶은데, 어때?”

 


곤란한 얼굴의 사구루가 생각에 잠긴 듯 턱을 매만졌다. 능청스럽게 키드의 예고 날이란 것을 모른다고 했지만, 정말로 모를 리가 없는 아카코는 고심해서 시간과 장소를 골랐다. 아카코를 보러 오기만 한다면 키드의 예고 시간 전까지 절대로 돌아갈 수 없는 곳 중 하나가 XX 공원이었다. 사구루가 OK만 한다면 말이다.

 


나와 괴도 키드 중에 한 명을 선택하는 게 꽤 어려운가 봐.”

코이즈미 씨.”

대답이 늦어지는 것만으로도 꽤 자존심이 상하고 있는데, 거절까지 당한다면-”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코이즈미 씨가 데이트 신청까지 해주셨는데, 거절할 수야 없죠.”

“-?”

 


고민할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렇게 쉽게 수락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이번에는 아카코가 놀란 눈으로 사구루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그럼요. 그럼 내일을 기대하겠습니다.”

 


진짜? 여전히 놀라서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이며 제자리로 돌아가는 사구루의 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조금씩 올라가는 입꼬리를 손으로 가린 채 만족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하쿠바 사구루라도 자신을 거절할 수 없는 것이다. 키드에게 밀리지 않았어. 이런 사실에 기뻐하며 아카코 역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자신의 말은 죽어라 듣지 않는 괴도 키드 따위는 정말로 죽어 버리라지. 호호호, 아카코는 즐겁게 웃었다.

 

 

 

 

 

 

 

 

 

약속 장소를 향해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분명 예언에서 비가 내리는 것을 보았음에도, 아카코는 미처 우산을 준비할 정신이 없었다. 몇 시간을 고심해 고른 붉은색의 원피스가 부슬부슬 내리는 비로 조금씩 젖어갔다. 아카코는 비를 하기 위해 잎이 무성한 나무 아래로 자리를 옮겨 섰다. 그리고 공원의 중앙에 위치한 시계탑을 바라보았다. 약속 시각인 8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시간에 철저한 하쿠바 사구루가 약속에 늦는 일이 과연 몇 번이나 될까?

아카코는 자존심이 상해 입술을 짓씹었다. 자신이 먼저 도착해 기다리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탐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10여 분의 시간이 아주 더디게 흘러갔다.

설마 내게 오지 않고 괴도를 잡으러 간 거야? 두고 봐, 하쿠바 사구루. 이 수모는 꼭 갚아 주겠어.

그런데도 역시 쉬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해가 진 데다가 비까지 내린 터라 갈수록 추워지고 있었다. 다시 시계탑의 시간을 확인하자 83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기다릴 만큼 기다렸어.

아카코는 빗방울이 방울진 머리와 원피스를 손으로 털어냈다. 이런 날씨에 비를 맞았다가 감기에 걸릴 것 같았지만, 당장 분을 삭이기에는 적당할 것이다.

 


“-코이즈미 씨!”

 


막 걸음을 떼려는 찰나였다. 공원의 입구로 기다리던 탐정이 달려오고 있었다. 순간 아카코는 잘못 본 줄 알고 제게로 달려오는 남자를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비가 내리는데도 우산을 펼치지도 못하고 손에 쥔 채 앞까지 달려온 사구루는 양손으로 무릎을 짚고는 숨을 골랐다. 약속 시각을 지키지 못한 것을 질책하려던 아카코는 젖은 얼굴을 손등으로 훔쳐내고 고개를 드는 사구루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비를 맞고 달려오느라 젖어버린 남자의 옷이 군데군데 더럽혀지거나 찢어져 엉망이었다. 게다가 얼굴까지. 저 잘난 얼굴에 상처라니. 아카코는 놀란 눈으로 긁혀 붉어진 사구루의 뺨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떻게 사과를 드려야 할지..”

무슨 일이야?”

 


사과의 말을 건네는 것을 잘라내며 아카코는 사구루의 턱을 쥐고 다른 곳에 또 상처가 있는지 확인하듯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사구루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오는 길에 작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늦은 거고?”

죄송합니다.”

 


미안한 듯 웃으며 사과를 건네는 사구루의 모습에 아카코가 한숨을 내쉬었다. 예언은 빗나갈 수 있겠지만, 어딘가 다치게 되는 것은 작든 크든 비켜 나가지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죽을 운명은 아니었던 것이다. 괴도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당장에는 그럼 된 것이다.

 


미리 연락하지 그랬어. 내가 아닌 괴도 씨에게 간 줄 알고 꽤 자존심이 상했었다고.”

오해하게 했군요. 연락드리고 싶었지만, 휴대폰이 망가져 버려서요.”

그런 게 아니니 됐어. 그보다 병원부터 가봐야 하는 거 아냐?”

그렇게까지 심한 건 아니니 괜찮습니다.”

 


아차, 사구루가 깜빡했다는 얼굴로 얼른 손에 쥐고 있던 우산을 펼쳤다. 이미 둘 다 축축하게 젖은 뒤라 우산이 필요할까 싶었지만, 비까지 맞아가며 기다리게 했다는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겠거니 생각하며 우산을 든 사구루의 곁으로 몸을 붙였다. 사구루는 아카코가 젖지 않게 우산을 좀 더 기울여 주었다.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되네요.”

괜찮아. 곧 따뜻한 걸 마실 테니까.”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제 쪽으로 우산이 기우는 탓에 사구루의 한쪽 어깨가 젖어간다는 것을 알아차린 아카코가 우산을 들고 있는 사구루의 팔에 손을 감았다.

 


실례할게.”

기꺼이요.”

 


아카코는 자신을 보며 빙긋이 웃는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고는 축축하게 비에 젖은 사구루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 얼굴이 홧홧해지는 것이, 계속 비를 맞아 추워진 탓일 테다. 얼른 따뜻한 곳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아카코는 손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나가면 괜찮은 카페가 있어.”

그럼 그리로 가죠.”

 


안내하겠다는 듯 먼저 걸어가자 사구루가 제게 맞춰 걸음을 옮겼다. 예언 때문에 시작한 데이트인 데다 처음이 좀 삐걱거렸지만, 나쁘지만은 않다고 마녀는 생각했다. 어차피 가지고 싶어 했으니까, 이걸 계기로 차근히 공을 들여 차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제 매력에 빠지지 않는 괴도 따위에게 연연해 할까 보냐.

사구루가 의아한 시선을 보내왔지만, 아카코는 그저 즐거움에 호호, 웃을 뿐이었다.

 

 

 

 

 

 

 

 

 

어머, 살아있었네?”

 


등교하자마자 책상에 엎어지는 카이토에게로 다가가며 얼굴 여기저기를 훑었다. 카이토가 질렸다는 얼굴로 아카코를 바라보았다.

 


꼭 죽길 바란 것 같은 말이네.”

그러게, 조심하랬잖아.”

 


괴도 키드를 향한 괴한의 저격 사건으로 언론이 떠들썩했다. 어차피 죽을 운명은 아니었던 거다. 무사한 것이 다행이면서도 못마땅한 기분이 들었다. 더 말하기 싫다는 듯 손을 내젓는 괴도를 팔짱을 낀 채 내려다보다가 흥, 코웃음 치며 몸을 돌렸다.

 


! 탐정 군은 다음 사건부터는 다시 돌려줄 테니 잘 해봐.”

진짜, 계속 뭐라는 거야.”

솔직히 재미없었을 거 아냐? 괴한이랑은 별개로 말이야.”

뭔지 진짜 모르겠고, 돌려준다는 그것도 필요 없거든.”

 


그냥 네가 아예 가져라, 가져. 카이토의 툴툴거림에도 아카코는 웃었다.

정말 그럴 거 거든.

괴도의 예고 일에 맞춰 데이트 신청을 한 이유가 궁금해서 거절하지 않았다는 사구루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코이즈미 씨에게는 언제든 시간을 내어드릴 수 있으니 탐정으로서의 시간도 조금 내어주시지 않겠어요?

 


상냥하게 웃으며 말을 건네던 모습을 떠올리며 아카코는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며 얼굴이 홧홧해졌다. 인사를 건네며 다가오던 아오코가 어디 아픈 거냐고 물어왔기에 괜찮다고 손을 내저어야 했다.

날씨가 화창한 날이 좋겠다. 다음 데이트를 할 때는.

 


좋은 아침이에요, 코이즈미 씨.”

 


아침 인사를 건네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아카코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따스한 햇살과도 같은 미소가 눈부셨다.

제 주변에서는 볼 수 없지만, 조만간 자신이 가지게 될 빛이다.

아카코 역시 마주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좋은 아침이야, 하쿠바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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