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2. 31. 17:14

 * 이전 카이른 전력 120분 '처음' 과 이어집니다.

1. '처음'







 방학을 시작하면 하고 싶은 일, 해야할 일 등을 종일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카이토는 한껏 신이 나 있었다. 선생님이 안겨 주시는 과제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방학이 끝나기 전 아오코가 해둔 것을 베끼거나 친구들과 날 잡아 몰아서 해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언제는 새로운 마술 연습을 해 보고, 또 언제는 친구들과 어딘가로 훌쩍 여행을 가보고, 그러다 지치면 종일 늘어져 잠을 잘 것이다. 그 사이사이 국내로 들어오는 빅쥬얼의 정보도 놓치지 않을테고, 키드로서의 일도 게을리하지 않을 생각이다.
 과제부터 얼른 해두라며, 이번엔 절대 빌려주지 않을 거라는 아오코의 잔소리는 이미 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등을 한 대 때린 후 어쩔 수 없다며 빌려줄 게 뻔했다. 등 뒤에서 한심하단 듯 바라보는 사구루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오늘은 날이 날이니만큼 그정도에 발끈해 하지 않았다. 
 괴도 키드가 아니냐며 눈에 불을 켜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스토커 하쿠바 사구루도 없고, 저주라도 걸것처럼 굴었다가도 예언이라며 무시무시한 말을 해대는 코이즈미 아카코도 없다. 방학은 이렇게 신이 나는 것이라 생각하며 카이토는 방학식이 끝나자마자 가벼운 발걸음으로 학교를 나섰다. 방학 내내 놀 생각에 너무 신나있는 거 아니냐는 아오코의 핀잔에 들켜버렸네? 대꾸하며 히죽 웃었다.
 당연한 것 아닌가, 방학인데! 내내 놀아야지. 일단 오늘은 집에 가자마자 늘어지게 잠을 잘 것이고, 내일은 새로운 마술 연습에 필요한 도구를 사러 나가야지.
 계획들을 하나하나 착착 떠올리며 막 교문을 나서던 카이토는 누군가 갑자기 제 앞을 막아선 탓에 신나게 움직이던 걸음을 멈췄다. 바로 코앞의 훌쩍 큰 키를 가진 상대를 보기위해 고개를 들었다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치고 있으니 눈앞의 사람이 길쭉한 팔을 뻗어 카이토의 어깨를 잡아 왔다.


 "오랜만이지요, 쿠로바 군?"


 카이토가 도망갈세라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줘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아무로 토오루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무카이] 카이른 전력 120분 '방학'

 

 

 

 

 "어? 카이토, 아는 사람이야?"
 "안녕하세요. 아무로 토오루 라고 해요. 쿠로바 군에게 잠시 볼 일이 있어 여기까지 찾아와 버렸네요."


 뒤를 따라오던 아오코가 카이토의 이름을 부르는 아무로를 호기심 어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니야, 대꾸하려 고개를 돌리는 카이토보다 한발 빠르게 아무로가 아오코를 잠시 바라보다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웃음이 몸에 밴 사람이다.
 저 웃음 뒤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기에, 카이토는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아오코에게 절대 자신과 관련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밝히려 했다. 하지만 이미 아무로의 상냥한 웃음에 흠뻑 빠진 아오코에게는 카이토가 보이지 않는 듯했다. 어느새 통성명하고 악수까지 하는 둘의 모습에 카이토는 뒷목을 잡았다.


 "방학식이라기에 학교로 마중 나와봤는데, 쿠로바군 잠깐 괜찮지요?"


 괜찮을 리가 없다. 절대 안 괜찮았다. 카이토가 애써 미소지으며 오늘은 곤란하다고 말을 하려니 그보다도 빠르게 아무로가 아오코를 돌아보며 손뼉을 쳤다.


 "그러고 보니 나카모리 군. 어딘가 익숙하다 싶었는데, 혹시 그 괴도 키드 전담이라는 나카모리 경부님의?" 
 "네, 맞아요! 아오코의 아버지세요."
 "역시 그렇군요. 언제나 키드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죠? 나카모리 군도 힘들겠어요."
 "정말 말도 아니에요. 매번 매번 키드 때문에 되는 일이 없어요. 아버지는 늦은 시간까지 일하시고 녹초가 되어 돌아오신다니까요."


 한숨까지 쉬어가며 말하는 아오코를 차마 돌아보지 못한채 식은땀을 흘리며 카이토가 아무로의 소매를 잡았다.
설마 이렇게 나올 줄이야..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렸을 때 이미 주변 인물들의 조사까지 모두 끝냈을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아오코까지 끌어들여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의 자리가 불편하기도 했지만, 아무로의 말을 거슬렀다간 무서운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카이토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당장 이 사람을 아오코에게서 떼어놔야 한다는 것만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아오코, 혼자 돌아갈 수 있지? 난 잠깐.."
 "치이, 다른 일이 있었으면 진작 알려줬어야지."


 볼을 부풀리며 아오코가 가볍게 투덜거렸지만 이내 웃으며 나중에 봐, 인사와 함께 카이토의 등을 툭 치고는 멀어졌다. 그런 아오코에게 손을 흔들어 주던 카이토가 눈을 굴려 아무로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멀어지는 소녀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던 아무로가 카이토를 돌아보며 따라오라는 듯 손짓했다.
 여기서 도망쳤다간 좋은 꼴 못 보겠지.
 앞서 걸어가는 아무로의 등을 보다 한숨을 폭 내쉬며 그 뒤를 따랐다. 근처의 주차장에 세워진 하얀 자동차 앞에 멈춰선 아무로가 보조석의 문을 열고 카이토를 돌아보았다. 말없이 보조석에 올라타자 문까지 닫아주고는 운전석으로 향하는 아무로를 카이토는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이 사람에게 휘둘리게 될까.
 뭔가 대책이라도 마련해야 할 테지만 당장엔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조사를 해봐도 나오는 게 없는 데다 약점 같은 것이라도 잡아볼까 싶어 살펴보아도 하는 행동에는 흠 하나 없다. 한동안은 정말 자신이 약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며 카이토는 다시 한숨을 폭 내쉬었다.


 "기분이 좋아보이지 않네요. 당 충전이라도 하러 갈까요?"


 카이토의 대답은 처음부터 아무래도 상관없었다는 듯 아무로는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어차피 맘대로 할 생각이면서 굳이 의견을 물어보는 이유는 또 뭐람.
 창문에 이마를 기댄 채 입을 삐죽이는 동안 금세 목적지에 도착한 듯 주차장에 들어선 차가 곧 멈추었다. 창문에 찰싹 붙어 어디인지 확인하던 카이토는 저도 모르게 입이 헤 벌어졌다. 최근 오픈한 맛있는 디저트를 파는 곳으로 학교에 소문이 자와자와한 가게가 바로 앞에 있는 것이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아무로를 돌아보니 역시나 그 디저트 가게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무심코 기쁜 것이 표정에 드러난 것인지 아무로가 카이토의 얼굴을 보고는 풋, 웃음을 터트렸다. 아차 싶은 마음에 얼른 손으로 입가를 가렸지만 이미 잔뜩 올라간 입꼬리는 들킨 지 오래였다.


 "요즘 여기 엄청 인기있거든요. 쿠로바 군 마음에 들 것 같았어요."


 아직 가게 앞에 온 것 뿐인 데다 맘에 든다고 말하진 않았지만 이미 속마음이 몽땅 들킨것이 민망해 카이토는 얼른 문을 열어 차에서 내렸다. 손님들로 가득한 가게를 행복감에 젖어 바라보고 서 있으니 어느새 다가온 아무로가 카이토의 어깨를 감싸 쥐고는 갈까요? 눈짓해 왔다. 생각지 못한 곳에 데려와준건 아주 조금쯤은 고맙지만 이런 거리감 없는 행동은 부담스럽고 한편으로는 무섭기까지 했기에 카이토는 얼른 어깨의 팔을 풀어내고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정말 무슨 생각인 거지?
 처음 집으로 쳐들어온 후로 아무로는 여러 차례 더 찾아 왔었지만 카이토는 끝내 집에 없는 척 문을 열어주지 않았었다. 아무로가 다녀간 날에는 현관 앞에는 손수 만든듯한 음식들이 가득 든 종이봉투가 놓여있었고, 카이토는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통에 넣어버렸다. 그런 사실들을 아무로가 아는지 모르는지는 상관없었다. 계속 피하는 것에 대한 후폭풍이 두렵긴 했지만 그렇다고 얼굴을 마주하자니 카이토로서는 더욱 무서웠기에, 앞으로도 계속 피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집으로 총이라도 들고 쳐들어오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설마 방학식을 맞은 학교로 찾아올 줄이야. 게다가 웃는 낯으로 자신을 데려온 곳이 디저트 가게라니.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카이토는 복잡한 얼굴로 가게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복잡하던 심정 따위는 몽땅 날아가 버렸다. 달콤한 냄새가 가득해 절로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곳이었다. 카이토는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싶어 안을 둘러 보았지만, 손님들로 복작거리는 가게의 테이블은 역시나 빈 곳 하나 없었다.
 포장 해서 가져가야 하나?
 카이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자리가 없는 것 같은데, 기왕 왔으니 포장해서 쿠로바 군 집으로 가죠?"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것이 아닐까? 
 어떤 것이 좋냐며 팔을 잡아끄는 아무로를 따라 진열대 안의 각종 디저트를 둘러 보는 카이토의 기분이 다시금 오르락내리락 복잡해졌다. 개수는 신경 쓰지 말고 먹고 싶은 걸 골라 보라는 말에 반쯤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이것저것 골라대자 아무로는 군말 없이 긴 줄을 기다려 그것들을 모두 계산하고 포장해 왔다. 덕분에 카이토 역시 군말 않고 또다시 아무로를 집으로 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진짜 목적이 뭐예요?"
 "전에도 말했지만, 당신에게 관심이 있어서죠."
 "거짓말."

 
 누가 그런 말에 속아 넘어갈까. 코웃음 치며 카이토는 갓 내린 커피와 함께 잔뜩 사 왔던 디저트 중 적당한 케이크 두어 개를 꺼내 하얀 접시에 담아내었다. 하지만 아무로는 그것들을 다시 카이토에게로 밀어줄 뿐, 먹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제 몫의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며 포크를 집어 들던 카이토가 눈꼬리를 올리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호감 가진 상대에게 할만한 행동은 아니네요. 저도 독 같은 거 안 탔으니 그냥 먹지 그래요?"
 "쿠로바 군이 맛있게 먹는걸 보는 게 목적이었을 뿐, 제가 먹으려고 산 게 아니니까요."
 "말은 참 잘 해."


 포크로 접시 위의 케이크를 푹 찔렀다. 그리고 크게 잘라 한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아무로 앞의 커피를 눈짓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아무로가 잔을 들고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그 모습에 만족스러워하며 카이토는 제 취향에 딱 맞게 달콤하고 맛있는 케이크에 집중했다.

 

 "호감이나 관심이니 그런 이유 대지 말고 그냥 이야기하세요. 그런 핑계에 속아 넘어 갈 정도로 순진하지도 않고, 서로 피곤하기만 하잖아요. 솔직히 지금 이런 것도."
 "아무나 덜컥 믿지 않는 건 좋은 일이지만, 너무 그렇게 의심이 많은 것도 좋지 않아요. 제가 보였던 호감을 모두 부정당해서 조금 서운하네요."
 "약점을 쥐고 흔들면서 호감 운운하는 사람을 믿으라고?"
 "그렇게라도 해서 접점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해도 믿지 않을 거잖아요."


 언제까지 사람 좋은 척 연기를 하며 자신을 구슬릴 생각인 걸까. 배알이 꼴리는 기분에 눈가를 찡그리며 연이어 케이크를 포크로 쿡쿡 찍어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볼이 터져라 케이크를 밀어 넣고 우물거리고 있으니 아무로가 웃는 낯으로 바라봐서, 카이토는 결국 제대로 맛보며 씹지도 못한 채 핫초코를 마셔 입안의 케이크를 모두 삼켜버렸다.


 "제가 이대로 도망이라도 간다면요?"
 "국내에선 도망갈 곳 없을 거라고 확인시켜 줄 수 있어요. 굳이 힘 쏟지 말아요."
 "해외로라면,"
 "괴도 키드는 세계 각국에서 잡으려 혈안이 되어있죠? 말했듯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다고 봐요."
 "당신 정체가 뭐예요?"
 "그건 차차 시간을 들여 이야기하자고 했던 것 같은데. 아직은 좀 이르죠."


 뒷세계의 사람만은 아닐 것이다. 카이토는 확신하며 양손으로 감싸 쥔 컵은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아무로 토오루의 정체에 대한 몇 가지 추측이 빠르게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그중 가장 가능성 있는 한 가지 추측만이 머릿속에 남았지만, 물증이 없었기에 카이토는 조만간 제대로 알아봐야겠다 생각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러나저러나 자신에게 눈앞의 남자는 위험하다.


 "호감이고 호의고 다 좋으니, 정말 목적을 알려주지 않겠어요? 언제까지 이런 겉도는 대화만 할 순 없잖아요?"


 아무로가 어깨를 으쓱이며 주머니를 뒤적여 반으로 접은 작은 메모를 하나 테이블에 놓고는 카이토에게로 밀어주었다. 눈으로 메모를 쫓았지만, 섣불리 손을 뻗어 집어 들 수가 없었다.


 "호의는 호의이고, 그것과 별개로 괴도 키드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이거 봐, 역시 뭔가 목적이 있었던 게 맞으면서.
 카이토의 못 미더운 시선을 알아차린 아무로가 곤란하단 듯 웃었다.


 "말했듯이 정말 별개의 문제,"
 "거짓말.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었으면서."
 "아니라고 하면,"
 "믿을 거 같나요? 어쭙잖은 변명 해대며 시간 끌어온 이유가 뭔지 모르겠네요."


 아무로의 말을 연이어 끊어가며 카이토가 투덜거렸다.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어느새 아무로의 미간에 주름이 잡혀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카이토는 입을 삐죽 내밀어 툴툴거리며 케이크를 조그맣게 조각냈다.


 "쿠로바 군, 정말 사람 말을 안 듣네요."


 케이크를 찔러대는 포크를 쥔 손을 아무로가 대뜸 잡아 왔다. 갑작스러운 남자의 행동에 의아해하며 카이토가 고개를 들자 아무로가 제 쪽으로 잡은 손을 끌어당겼다. 어어? 하는 사이 억센 힘에 몸이 반쯤 끌려간 카이토가 둘 사이에 있는 테이블을 잡아 버텼다.


 "뭐, 하는..!"


 더는 카이토가 끌려오지 않자 이번엔 아무로가 테이블에 한쪽 무릎을 올려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카이토의 팔을 쥐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멱살을 잡아끌어 올리고는 다짜고짜 입술을 맞대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아무로의 행동에 얼음이 된 카이토가 경악으로 물든 눈을 꿈뻑였다. 배려 없이 입술을 물어뜯고 벌어진 잇새로 혀를 밀어 넣는 행동에 정말 지금까지 상냥하게 웃어대던 남자가 맞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잡히지 않은 손으로 아무로를 밀어내며 어깨를 쳐댔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물어뜯긴 입술이 찢어져 입안에 기분 나쁜 피 맛이 맴돌았다. 좀처럼 떨어지지 않은 채 겹쳐진 입술이 비벼지자 따끔하게 아파져 와 카이토는 더는 참지 못하고 결국 아무로의 얼굴을 향해 힘껏 주먹을 날렸다.


 ".........."
 "헉, 허억.."


 가빠진 숨을 몰아쉬며 카이토는 한쪽 뺨이 붉어진 아무로를 바라 보았다. 그러다 서늘한 시선과 마주쳐버려서, 사색이 되어 여전히 잡혀있는 멱살을 풀어내려 버둥거렸다.


 "쿠로바 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 카이토는 차마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 채 식은땀을 흘렸다. 잘못은 저 남자가 먼저 했건만 왜 자신이 이렇게 쫄아야 하는지 영문을 모르겠지만 당장엔 무서웠기에, 카이토는 겨우 눈만 들어 아무로를 바라 보았다.


 "심한 짓을 해버려서 미안해요. 말로 해선 더 들어줄 것 같지 않아서 조금 욱해 버린 것 같아요."


 그렇게 풀어내려 밀어내도 꿈쩍 않던 손이 거짓말처럼 쉽게 떨어져 나갔다. 갑갑하게 잡혀있던 멱살이 풀리자 카이토는 얼른 아무로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찢어져 피가 배어든 카이토의 입술을 향하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앞으론 주의할 테니 이번 일은 맘에 담아두지 말아요."
 "그걸, 어떻게 믿어. 이 변태, 치한."


 무서운 건 무서운 것이고, 그렇다고 할 말을 못 하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카이토는 아릿한 입술을 손등으로 가리며 불신 가득한 시선을 아무로에게 보냈다. 미안한 듯 웃고 있었던 것 같던 아무로의 얼굴 가득 억지 미소가 번졌다.


 "쿠로바 군, 그런 호칭은.."
 "변태, 아저씨."
 "..이 망할 꼬맹이가."


 얼굴은 웃고 있지만 부득 이를 갈며 또렷하지 않은 목소리가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호감이니 호의니 그럴싸하게 말하더니만."
 "그러니까, 그거라고 몇 번이고 말했잖아?"
 "결국 나같이 힘없는 꼬맹이한테 나쁜 짓 할 생각이었던 거잖아."
 "그런 게 아니라고 방금까지 말 했던 것 같은데, 그보다 대체 누가 힘없는 꼬맹이라는 것인지 모르겠네. 일단 정말 그런 게 아니라는 말 좀 들어주지 않겠어?"
 "아니긴, 그럴 맘 가득한 게 딱 보이는데."


 어느새 서로에게 존대하던 것도 사라진 채 말을 주고받으며 둘의 살벌한 시선이 얽혔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런 상태일 순 없었기에, 아무로가 양손을 들어 보이며 한숨지었다.

 
 "이 상태로는 제대로 된 대화는 무리일 듯하니 나중에 다시 이야기 해..보죠."
 "이제 와서 상냥한 척 굴어봤자 늦었어."
 "확인하고, 연락해."


 정말로 더는 제대로 된 대화는 무리라고 생각한 아무로가 테이블 위 메모를 가리켰다. 싫다고 했다간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일을 당할 것 같은 기분에 카이토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에 만족한다는 듯 아무로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카이토에게 맞은 뺨을 그제야 손등으로 쓸어냈다.


 "혹시라도 정말 도망갈 생각은 않는게 좋을거야."
 "무서워서 어디 도망이라도 가겠어? 볼일 끝나셨으면 그만, 돌아가, 주세요."


 문을 가리키며 돌아가 달라는 말에 힘을 줘 말하자 아무로가 피식 웃었다.


 "잔뜩 겁먹은 모습을 하고 오기 부려봤자 귀엽기만 하다고." 
 "소름 끼치는 소리 하지말고, 그만 좀 가지."
 "아, 쿠로바 군. 방학 숙제 같은게 있다면 미리 해 두는게 좋을거야. 방학 내내 바쁠 테니까."
 "?? 그게 무슨 말.."
 "함께 즐거운 방학을 보낼 거란 말이지."


 문을 열고 집을 나서던 아무로가 돌아보며 찡긋 윙크해 보였다. "그럼 꼭 연락해줘요." 그리고 요란하게 문을 닫았다. 카이토는 이미 사라져 보이지 않는 아무로를 대신해 문을 노려보며 남자가 한 말들을 곱씹었다. 그리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성을 질렀다.
 역시 처음 정체가 탄로 났을 때 해외로 도망이라도 갔어야 했다. 즐거워야 할 방학을 잃게 될 괴도는 뒤늦은 후회를 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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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IMØ(리모)